허난설헌
- 본관양천(陽川)
- 호난설헌(蘭雪軒)
- 활동분야시화
- 주요저서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 출생년도1563년
- 사망년도1589년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명종 18년(1563), 강릉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이다.
천재시인 난설헌의 소녀시절은 아버지 허엽의 관직생활로 부유하였고, 그의 시세계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친 오라버니 허봉도 난설헌 열살 때 대과에 합격하고 열다섯 살 때 교리가 되는데, 이러한 오라버니의 출세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난설헌의 꿈을 한껏 부풀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난설헌은 14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김첨의 아들인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이 강당의 동창이었고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있는 집안이었고, 시어머니 송씨 역시 당내 경학으로 유명한 이조판서 송기수의 딸이었다.
허균은 누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마지 않는>, <오호라 살아서는 부부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모실 아들하나 없구나. 아름다운 구슬이 깨어졌으니 그 슬픔이 어찌 끝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부금슬도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난설헌에게 설상가상으로 밀어닥친 불행은 사랑하는 두 자녀를 차례로 잃은 일이었다.
그 충격으로 유산까지 하게 되는 등 불운이 연속되었다.
난설헌을 애지중지하던 아버지 허엽은 난설헌 18세 되던 해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상주 객관에서 돌아가셨고, 가장 믿고 따랐던 둘째 오라버니 허봉 역시 난설헌이 21세 되던 해 동인에 속한 학자들과 율곡을 논하다 죄를 얻어 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난 후에도 한양에는 들어갈 수 없어 금강산을 떠돌다가 끝내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객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난설헌은 허봉이 죽고 1년이 지나 27세 되던 해 이 세상을 하직했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여성의 삶의 목표가 되던 시대에 현숙한 어머니와 어진 부인이 될 수 없었던 난설헌에게 단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활화산처럼 넘쳐 흐르는 시혼의 분출이었다.
난설헌의 시풍은 일찍이 오라버니 허봉과 당시 삼당시인으로 유명했던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정감있게 묘사하고, 시어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1589년 3월 19일 꽃다운 나이 27살에 요절한 누이 난설헌의 재능을 애석하게 여긴 동생 허균은 그 유작을 모아 <난설헌고>를 편집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초간본이 나온 것은 선조 41년(1608)으로 난설헌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의 일이었다.
그 사이 난설헌의 시는 헌신적인 허균의 노력에 의해 멀리 중국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579년은 정유왜란의 해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명나라 원군이 조선에 들어오는데, 1598년 봄 명나라 시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문을 모아 <조선시담>을 엮은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장군들을 접대하는 관직인 경리감독이었던 허성과 병조좌랑이었던 허균의 집에 오명제가 머물게 된 것이 난설헌 시가 중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