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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국사

석천우물
석천우물
범일국사

신라의 선승(禪僧). 강릉출신으로 성은 김씨,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의 개창조(開創祖)이다. 할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씨이다.

그의 출생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범일의 어머니 문씨가 규중처녀(閨中處女)로서 이른 새벽 해뜰무렵 굴산사지 터에 있는 석천(石泉)에 물을 길러 갔다가 목이 말라 해가 비친 석천의 물을 떠 먹었는데 곧 잉태하여 13개월만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에 집안에서는 불길한 징조라 하여 아이를 학바위 밑에 버렸는데 학(鶴)들이 이 아이를 품어 보존하였다. 문씨는 이를 불쌍히 여겨 데리고 와 키웠는데 그가 바로 범일이라고 한다. 이름을 범일 또는 품일이라고 한 것은 몽조(夢兆)에 햇무리를 보았다 해서 '日'자를 넣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또한 어머니 문씨가 처녀 때에 석천의 우물 물을 길러 갔다가 그 우물에 햇무리가 비친 것을 먹고 잉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범일은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흥덕왕 6년(831)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리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도이다"라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범일은 크게 깨우쳐 제안의 문하에서 6년간 수학하고 나서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크게 인정을 받았다.

문성왕 6년(844) 당 무종의 법난이 일어나자 상산(尙山)에 숨어 지내다가 소주(韶州)로 가서 혜능(慧能)의 탑에 참배하고 847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년동안 백달산에 머물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崛山寺)로 옮겨 40여년 동안 선문(禪門)을 펼치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였다.

이때 신라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모두 그를 흠모하여 국사(國師)로 봉하고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는데 범일은 사양하고 굴산사에 머물렀다. 그는 후학을 교화하면서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 "부처의 뒤를 따르지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본래 부처로서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향년 80세, 승랍 60세로 889년 5월 1일 입적하면서 남긴 말에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하였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제자로는 행적(行寂)과 개청(開淸)이 있다. 현재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에 굴산사의 유적과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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